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P-51 머스탱 (문단 편집) ===== [[서부전선]] ===== 위의 개발사와 같이 초기형 머스탱은 영국군에 우선 배치되었지만, 중,고고도 성능 부족 때문에 공격기나 사진정찰기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범상치 않은 능력을 선보여서 시야가 좋지 않은 기상을 골라 서유럽 점령지 및 독일 내륙으로 저고도 침투하여 지상의 각종 목표물들을 기습하거나 정찰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기본적으로 속도와 항속거리가 받쳐주기에 가능했던 전법이었다. [[디에프 상륙작전]] 에도 참가하여 지상군 지원에 나섰으며, 이 때 요격에 나선 [[Fw-190]]을 격추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미군도 초기형 머스탱을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하였으나 역시나 주임무는 지상 공격 및 전술 정찰이었다. 이 때까지는 어디까지나 보조전력으로서 활용되고 있었지만 B/C형 머스탱이 개발되면서 유럽상공의 제공권 쟁탈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다 틀렸어… 우리는 이미 전쟁에서 진 거야.''' >---- >― 나치 독일 공군장관 겸 [[대원수|제국원수]](Reichsmarschall) [[헤르만 괴링]][* 하노버 상공에 머스탱이 출몰했다는 보고를 들은 뒤, 이들이 베를린 상공에도 나타날 거라며 한탄한 말로 전해진다.] 1943년 중반에 B형이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장거리 호위전투기로서 가능성이 엿보였던 머스탱은 1943년 말부터 폭격기 호위에 동참하기 시작했으며, [[대주간]](big week)이라 불린 1944년 2월 나치 독일의 군수공장과 연구, 개발시설에 대한 공격부터 본격적으로 유럽 상공의 제공권 쟁탈전에 참전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루프트바페의 공습이 없던 이유가 대주간의 손실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한가지 요인은 맞지만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며 독일측 지휘부의 오판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대주간 당시 독일 공군의 손실은 전투기 약 262기 가량, 100명의 파일럿 전사, 250명의 항공기 승무원 사상이며, 영미 공군의 손실은 폭격기 352기, 호위기 28기, 항공기 승무원 2000명 이상 포로 또는 사망으로 오히려 손실 자체는 연합군이 더 컸다. 물론 독일이 상실한 기체는 전부 전투기이며 슬슬 인적자원도 부족해지는 시점이라 방공능력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기는 하다.] B-17 등 폭격기만 상대했을 때에도 폭격기의 강력한 자체 방어 때문에 조종사/기체 손실을 차근차근 강요받았던 독일 공군에게, 호위에 중점을 둔 기체이면서도 적절한 공중전 성능을 갖춘 P-51의 호위는 '''대[[재앙]] 수준'''이었다. 강력한 P-51의 호위를 뚫고 또 다시 방어기총으로 중무장한 폭격기에 접근해야 하는, 훨씬 어려운 임무를 강요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폭격기 요격에 나선 독일 공군, 특히 숙련 조종사의 손실은 당연히 급증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격추에 성공한 [[B-17]]의 숫자도 줄어들었기에 그만큼 독일은 연합군의 폭격에 더욱 취약하게 노출되었다. 독일 전투기들이 [[호위기]]를 무시하고 폭격기에만 달려들도록 지시받았기 때문에 교환비가 불리하게 나왔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내용이다. 첫째, 요격부대가 요격받을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호위 전투기를 배치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전술중 하나로 막장으로 악명을 떨친 일본군의 [[카미카제]]조차도 가급적 호위기를 붙이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그나마 상식적이었던 [[독일 공군(나치 독일)|독일 공군]]은 호위 전투기의 위협을 받게 되자 중무장/중장갑의 [[Fw 190]]에 요격임무를 주로 맡기고 [[Bf 109]]는 Fw 190을 호위하도록 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위의 호위 전투기를 무시하라는 지시도 Fw 190이 요격임무를 전담하고 이를 Bf 109의 호위부대가 막아낸다는 가정하에서나 성립하는 것이지 독일기 전체가 호위 전투기를 무시하라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둘째, 정작 연합군의 전투조종사들은 1940년의 영국 상공에서의 독일 전투조종사들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의 불리함을 안는 것을 감수해야만 하는 폭격기 호위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전투기 단독으로 수행하는 Fighter-sweep 임무를 더 선호했다. 셋째, 어차피 1944년에 들어서면서 미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보유한 전투기가 남아도는 나머지 지상공격 임무에 전투기를 대거 투입하기 시작하고, 지상공격중 입는 손실이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그걸 버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렇게 다방면으로 서방 연합국의 공군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는 전술적 실책 한 두개가 만회되었다고 해서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다.[* 여기에 대해서 반론으로는 1943년 10월 11일 슈바인푸르트 공습( 77기의 B-17 격추, 132기의 B-17 경파/중파, 호위기 P-47 한대 격추)과 역시 1944년 2월 넷째 주[[논쟁 작전| Argument 작전(대주간)]](357기의 영미군 폭격기 격추, 호위 전투기 28기 격추)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손실한 연합군 전투기/폭격기의 비율은 0.84로 폭격기 1대당 전투기 0.84대가 격추되었으므로 폭격기뿐 아니라 전투기와의 교전 또한 회피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첨언하자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의 전투기/폭격기 손실비가 0.86이므로 양쪽의 비율은 비슷한데 BoB에서 영국 공군이 독일 폭격기만 노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연합군 폭격기가 대주간 이전에는 제대로 된 호위기의 호위를 받지 못했던 점을 고려하면 호위받기 시작한 이후의 격차는 더 좁혀질 것이다.] 전략 폭격에 의한 생산 시설 등의 중요 시설의 파괴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과가 그다지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폭격기 편대의 호위와 지상공격을 통해 폭격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에도 꾸준한 전투기와 파일럿의 손실을 일으키고, 연료 수송과 연료 그 자체를 망가뜨려버린 것이 또다른 큰 타격으로 작용했다. 그 상황이 이제 더욱 악화되어 폭격기 호위에 만족하지 않고 베를린이든 어디든 독일 땅이라면 어디든지 떼거지로 날아와 독일 전투기들을 많이 격추했고 기지, 비행장, 전차, 트럭, 열차, 독일군 행렬, 그외 눈에 보이는 모든 표적에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어 기관총탄, 폭탄, 로켓탄으로 공격을 퍼부어대며 쑥대밭을 만들어대는 P-51과 영국군의 [[호커 타이푼]], [[호커 템페스트]] 미 육군 항공대의 [[P-47 썬더볼트|P-47]]마저 공격에 가담했다. 무엇보다 독일 공군은 서부 전선에서 양질의 영국과 미국의 공군만이 아닌 동부전선에서의 소련군 전투기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통에 공군전력이 상당히 분산되어 있었다. 전력을 다해도 영국과 미국 공군에 비슷비슷할 독일 공군은 전력이 분산되며 공군의 수요가 증가했고 신참 파일럿들에 대한 적절한 양성 기간과 베테랑들에 대한 적절한 휴식 및 재배치 기간을 가지지 못했다. 이로 인해 독일은 1943년 후반부터 조종사 인력들의 질적인 저하가 서서히 오기 시작해 1944년 2월을 기점으로 서부전선에서 열세로 기울었으며 1944년 11월이 되면 서부전선에서는 숙련 조종사는 정말 톱급의 에이스 조종사들 소수를 제외하고 전멸하게 된다. 반면 P-51은 이러한 숙련병이 없는 독일을 상대로 [[척 예거]], 클라우드 크렌쇼, 빌 위스너, 조지 프레디 등 단 하루에 다섯 대 이상의 독일기를 격추하는 1일 에이스 조종사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헤르만 괴링이 위와 같이 한탄했다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항공 우세를 상실하고 피해가 누적되어가는 상황에서 이는 사실상 종전 선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P-51D 머스탱은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고 나치 독일이 항복하는 날까지 독일 영공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독일군 병사라면 언제 어디서나 먹이를 찾는 송골매처럼 하늘을 떠돌며 목표를 포착하는 동시에 하늘에서 심심하면 내려꽂아오며 기총과 로켓, 폭탄을 쏟아부어대던 P-51의 은빛 날개를 볼 수 있었고 독일 공군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Me262]]도 전투 손실중의 절반 이상이 자신의 기지에서 이/착륙 도중에 P-51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P-51와 연합군의 제공권 장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Me262는 제트기이고 제트기의 속도를 이용하여 폭격기 요격을 위해 이륙했으며 속도를 이용하여 호위기를 무시하고 요격 후 이탈하는 전략의 특성상 공중전이 벌어질 일이 없으니 당연히 이착륙 도중의 손실이 커질 수 밖에 없기는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본인들 기지에서 파괴당했다는 것은 그만큼 연합군이 제공권을 철저히 장악했다고 볼 수 있다. 종래의 P-47과 비교했을 때 P-51이 독일 공군의 전투기들에 대해 갖고 있는 우위는 그 항속거리라고 할 수 있는데 직접적인 전투성능과 큰 관계가 없던 이 장점이 전략적 측면에서는 실로 엄청난 강점이 되었다. 1940년 영국 본토를 공격하는 독일 공군이 큰 피해를 입고 결국 히틀러가 계획한 [[바다 사자 작전]]이 취소되면서 영국 왕립 공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군 전투조종사들은 독일 폭격기들을 '동속으로 동행하며 근접호위하라'라는 괴링의 명령이 전달되었을 때 일제히 탄식을 했다고 한다. 본질적으로 제공권 장악을 위해서 폭격기들과 동행하는 것은 당시에도 상책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으며 장점이라고는 폭격기 조종사들의 사기진작 이외에 전술적으로는 딱히 없다는게 중론. 호위편대는 전투기의 장점을 살려 고속, 고공으로 폭격기 본대에 한 발 앞서 가며 다가오는 적들을 색출하여 선제적으로 교전하고 막는 것이 최상의 호위전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독일 공군 조종사들은 자조적으로 'kettenhunde'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슬에 묶인 개'라는 뜻이다. 즉, 호위기는 개집에 사슬로 묶여있어봤자 소용이 없고 사냥개가 사냥꾼들 앞서 나가며 사냥감을 몰이하듯 줄을 풀어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1944년 초반까지 미군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호위방식을 사용했으나 준장으로 승진하여 미 육군 항공대의 공중전 전략전술을 총괄하게 된 제임스 둘리틀의 등장과 함께 상황이 크게 바뀐다. 둘리틀 준장은 기존의 호위방식을 버리고 "모든 전투기들은 호위기에 앞서 나가 독일 깊숙히 들어가서 자유롭게 사냥하라"는 사실상의 프리헌트(free-hunt) 방침을 낸다. 폭격기들과 함께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독일 공군 전투기들이 공격해오는 것을 반격하는게 아니라 전체적인 숫적우위를 충분히 활용하여 폭격기들에 앞서 독일 영공 깊숙히 침투하여 독일 공군을 상공으로 유인하여 일제섬멸하는 유연한 전략을 택한 것이다. 떼거지로 폭격기 멀리 앞서 몰려다니면서 독일 공군이 대규모 요격편대를 형성하기 전에 이끌어내어 박살내고 돌아다니면서 맘대로 하라는 대담한 요격섬멸 전술이었다. 그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독일 깊숙한 영토까지 날아들 수 있었던 것이 P-51D였다. 이 방침은 폭격기 비행대 입장에서는 직접적인 보호자들이 사라지는 불안한 상황을 초래하기에 반대가 있었으나 도리어 결과적으로 독일 공군에 보급되는 연료, 탄약, 심지어 먹을것까지 전선으로 보내지는 게 차단되는 효과가 나왔고, 이는 독일 공군의 작전이 힘들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독일 육군마저도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연합군의 지상군을 막아낼 수 없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마찬가지로 소련의 물량을 처절하게 받아내고 있었던 상황에서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닥치는 서방연합군의 지상공격기들을 막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어찌 보면 전술적으로 전략 폭격기들을 희생하는 어이없는 방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전략 폭격의 목적을 전투기들이 대신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P-51의 항속거리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